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문단 편집) == 사건 내용 == [[https://youtu.be/dEG7golYuUo|관련 영상]] [[1980년]] [[5월 23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3·7·11공수여단 부대원들은 광주 곳곳에서 무차별 진압과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주남마을은 광주에서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광주로 들어오거나 나가려는 차량을 차단하는 주둔지가 되었다. 5월 23일 오전 화순으로 향하던 미니버스에 공수부대원들이 총격을 가해서 18명 중 15명을 사살하고 남은 사람 3명 중 중상자 2명을 공수부대원들이 데리고 가자 상급자로부터 '왜 데려왔냐,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고 인근 야산으로 끌고가 총살하여 [[암매장]]하였다. 이 사실은 당시 유일한 생존자 홍금숙 씨와 7공수여단 출신 최영신 씨가 주남마을 총격사건의 진실을 증언하면서 밝혀진 부분이다.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은[*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손에 부상만 입은 채 목숨을 건졌다.] 1988년 청문회에 증인 신분으로 참석했다. >"'''저희들이 차에서 살려달라고, 여학생들이 몇 명 있었거든요''' >'''살려달라고 손을 흔들고 그러는데도 계속 총알이 날아오고''' >(중략) >'''대검을 탁 들이대면서 하는 말이''' >''''너도 유방 하나 잘리고 싶냐' 그러더라고요 "''' >---- >1988년 광주 청문회에서 나온 증언 中 당시 숨진 사람들의 몸에는 모두 [[.223 레밍턴]] 총알이 [[M16 소총|박혀 있었고]] [* 당시 대한민국에서 쓰는 무기중 [[5.56×45 mm NATO|223rem]]을 쓰는 소총은 사실상 M16뿐이었다.즉 사용된 무기는 M16으로 추정]몇몇 시신에서는 총검에 찔린 상처도 발견된 걸로 보아 [[확인사살]]이 이뤄진 걸로 보인다. 사망자가 17명이라는 전투교육사령부 상황일지와는 다르게 광주시 조사에선 11명으로 나왔다. 끌려간 2명을 제외한 4명의 시신은 어디로 간 걸까?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두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다. 11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은 오전 9시, 17명인 사건은 정오쯤에 일어난 것으로 파악되며 두 사건 장소는 약 500미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실제 홍금숙의 증언에도 군인이 11명 사건을 언급한 대목이 등장한다. 한편 현장 지휘관은 [[5.18 민주화운동/왜곡/무장폭동설|폭도들이 총격을 가하며 돌진해 왔기 때문에 발포로 진압했다고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